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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공부

노벨문학상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두 인물, 하나의 진리

by 꿀꿀라이프 2024. 9. 30.

노벨문학상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두 인물, 하나의 진리

한강 작가의 추천 도서 목록에 올라가 있는 데미안을 집필한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 독서감상문 지금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어며 헷갈린 부분이 있는데 바로 두 인물 고타마와 싯다르타입니다. 소설 속에 싯다르타는 주인공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뒤로 한채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 과정 속에 깨달음을 얻은 자인 고타마를 만나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리고 고타마와 싯다르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기원전 560년경 인도 사캬국 카필라바스투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세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심신의 유혹의 물리치고 보리수에 깨달음을 얻고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열반에 든 샤카무니(= 샤카족의 성자) 석가모니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고타마와 싯다르타를 두 인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불교의 선문답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누구나 부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물론 깨달음을 얻는 순간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합천 해인사에 가면 조선말 경운스님의 제자 만공스님이 머물렀다 무이당이 있습니다. 무이당이란 둘이 아니란 뜻을 가지고 있지요. 고타마와 싯다르타는 둘이 아닌 하나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

소설 속으로 들어와 고타마와 만난 싯다르타가 깨달은 사실은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깨닫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하고 경험하지 않으면 세속과 심신의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헤르만헤세의 소설을 읽어며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자신들의 스승)은 예순이나 되었지만 아직 열반에 이르지는 못하였어. 그분은 일흔이나 여든이 되실 테고, 자네와 나, 우리도 그 분과 마찬가지로 나이 들어갈 것이고 , 자기 수행을 할 것이고, 금식을 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또 명상도 하게 되겠지. 그러나 우리는 열반에 이르지는 못할 거야, 스승도 우리도 열반에 이르지는 못할 거란 말이야. 고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라문 들 중 아마 어느 누구도, 어느 한 사람도 열반에 이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네. 우리는 여러 가지 위안을 얻기도 하고, 마비 상태를 체험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교묘한 재주를 배우기도 하지. 그렇지만 우리는 본질적인 것, 즉 길 주의 길은 발견하지 못할 거야.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민음사 34쪽-

 

 

건방진 말이지만 종교인들이 깨달음 얻기 위하여 절에서 공부하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평생을 노력합니다. 그래서 절에 있는 스님 모두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깨달음 얻기 위해 노력하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스스로를 깨달음을 위해 노력한 사람인 것을 깨달은 것처럼 속이고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거짓입니다. 깨달음은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자신을 부수고 무너뜨리고 절치부심 끝에 만나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완벽한 일은 없습니다. 항상 우리는 당황합니다. 나는 배운 사람이고 멋지고 우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깨지기 쉬운 그릇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깨지지 않는 그릇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게 무엇이냐고 저에게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깨달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헤르만 헤세 소설에서도 이와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가르쳐 달라고 어떻게 하면 열반에 들 수 있느냐고 하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소설에서는 항상 정답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메세지를 전합니다. 소설 속의 싯다르타 또한 타인의 가르침으로는 고타마와 같은 깨달은 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사문과 승려의 지위를 다시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가 세상의 모든 유혹을 받아들이고 소위 우리말로 번 아웃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자신의 아들을 만나며 고통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싯다르타의 일생이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제 3자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싯다르타에게 모든 것이 떠나 갔을 때 싯다르타는 강가의 뱃사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스스로 깨달음 얻었는지도 모르는 선배 뱃사공이 있습니다. 싯다르타가 묘사하고 생각하는 선배 뱃사공은 고타마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것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소설의 말미에 그처럼 변해갑니다. 강의 소리에 기울이며 세상만사가 자연의 흐름대로 흘러감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타마를 따라간 친구 고빈다를 다시 만납니다. 친구 고빈다는 여전히 깨달음 갈구하고 있습니다. 스승님에 배움을 갈구하고 몇 십년만에 만난 싯다르타에게 깨달음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여전히 배움의 틀 안에서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고빈다가 열반에 들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수행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교과서대로 편하게 수행을 한 것입니다. 선을 갈고닦음으로 세상에 해롭지 않은 인물은 되었을지언정 자기 스스로를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외부의 가르침에 인생의 대부분을 소비한 것입니다.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 배경자아 그리고 알아차림

요즘 유튜브와 책으로 만나고 있는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진정한 나 배경자아를 찾고 배경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는 이 단계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단계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온전히 깨어있고 모든 순간을 알아차림으로써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이 되겠지요. 묘한 공감이 일어나며 소설 싯다르타의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소설 싯다르타의 마지막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마지막 부분은 4쪽은 깨달음 얻은 싯다르타를 찬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헤르만 헤세가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쏟아 깨달음을 표현해 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읽은 이로 하여금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 아무리 글로 써도 끝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리송한 여운이 남는 싯다르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심고 나를 찾아가는 시간,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를 둘러싼 수 많은 배움에서 벗어나 오로시 나를 알아차리는 순간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